다이닝. 약속에 늦는 일행 혹은 일찍 도착한 나. 맨둥맨둥 빈 손으로 애먼 벽을 응시하거나, 메시지도 오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일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식전주로 칵테일 한 모금을 홀짝일 수 있다면, 2차를 가기엔 부담스러울 때 그 자리에서 딱 한 잔을 더 즐길 수 있다면. 해외에서의 일상적인 풍경을 떠올리며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 있다면, 있다. 한국에도. 우리의 일상이 되기에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닝 속 바 문화를 싹 틔우고 있는 곳들. 바텐더가 만들어 주는 칵테일을 마시러 나는 오늘, 다이닝에 간다.
숯을 활용한 다이닝이 하나 둘 늘어가는 사이, <필레터>는 그 존재감을 더욱 뚜렷하게 그려왔다. 육류 보다는 해산물에 방점을 두고, 일식과 프렌치에 속할 듯 속하지 않는 ‘필레터식’ 조리법으로 완성한 요리들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을 ‘남다른’ 다이닝으로 인식하게 하는 건 바텐더의 존재다. 레스토랑 한 편의 바에서 간단히 한 잔을 즐기는 문화를 꿈꾸던 정세욱 셰프의 오래된 바람은 문대범 바텐더를 만나면서 제대로 실현됐다. 그 역시 일본 여행 중 다이닝과 바가 결합된 공간에서 사람들이 칵테일과 위스키, 음식을 함께 즐기는 모습에 큰 영감을 받았던 차였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진심이 통한 걸까. 다이닝에서 바텐더가 만들어주는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것을 생소해하고 놀라움을 표했던 손님들은 어느새 ‘칵테일’의 단골이 됐다. 요리 없이 칵테일만 즐기러 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 공간과 어우러지는 한 잔을 만들려는 노력도 통했을 것이다. 창 밖으로 나무가 드리운 정원 뷰와 어울리는 칵테일을 꼽는다면 ‘필레터 뮬’. 루이보스를 인퓨징한 진과 생강 시럽, 라임, 민트를 활용해 청량하면서 스파이시하고 우디한 느낌을 살렸다. 식전주로 추천하고, 새우, 꽃게, 굴, 가리비 등에 숯불의 터치를 입힌 ‘해산물 플래터’, 갈치로 만든 ‘피쉬 앤 칩스’ 등의 기름진 맛을 잡기에도 그만이다. 하지만 절대로 요리의 맛을 덮치지 않는 그 선을 절묘하게 조절한 맛이 인터뷰 내내 겸손함을 보이던 바텐더와 꼭 닮아 있다.
다이닝을 찾는 손님들이 대부분 와인 페어링을 즐긴다는 점에 착안해 와인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경험을 주기 위한 노력도 메뉴 면면에 녹아 있다. 대표적으로 ‘화이트 캄파리’는 무결하게 투명한 모습과 달리 쌉쌀함과 달콤함, 향신료의 풍미가 복잡 다단하게 담겨 있다. 캄파리, 진, 초콜릿, 오레가노 등을 배합한 후 밀크 워시 기법을 통해 컬러를 없앤 것. “다이닝에서도 얼마든지 트렌디한 칵테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바텐더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손님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그 칵테일 생각나서 왔어요”라며, 바텐더가 아닌 칵테일이 얼굴이 될 수 있는 한 잔을 만들고자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함께였다.
Bartender’s TIP
오픈 키친의 활기가 느껴지는 바 테이블도 좋지만, 매장 한 편에 마련된 작은 바 공간에서 스피릿이 잔뜩 진열된 백 바를 마주한 채 요리를 즐기는 경험도 색다를 것. 혹시 아나? 바텐더가 서비스로 칵테일 한 잔을 내밀지도. 또 백 바에 진열된 위스키 중 ‘블루 리본’이 달려 있는 것을 찾아 바텐더에게 물어보자. 뜻하지 않은 행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은 경력이 짧지만 저의 경험, 현장의 재료를 바탕으로 이곳만의 새롭고 맛있는 칵테일을 만들어 드릴 수 있다고 자부한다.” 다소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 김지민 바텐더가 서 있는 곳은 스패니시 파인다이닝 <사라우츠>다. 오픈 때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만큼 다이닝, 적어도 이곳에서의 칵테일은 ‘이래야 한다’는 걸 그 만큼 이해할 사람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과연 이유 있는 자신감이다. 특히 최경훈 셰프의 요리와 핑퐁하듯 칵테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가, 다시 조연으로 물러서게 하는 모양새의 페어링이 재미있다. 먼저, 주인공으로서의 칵테일을 맛보고 싶다면 봄과 초여름 시즌에 나오는 여리여리하고 순한 맛의 재료들로 구성한 ‘태안 갑오징어, 청도 미나리, 성주 참외, 제주 아스파라거스’와 칵테일 ‘사라우츠 피스코 사워’의 매칭을 추천한다. 요리는 아주 옅은 숯불의 터치만 더하는 등 최소한의 조리로 섬세한 맛을 표현한 반면, 칵테일은 딜을 인퓨징한 피스코로 시원한 허브 향을, 꼬앵트로, 리치시럽, 라임주스로 산미를 도드라지게 살렸다. 다음은 ‘바스크식 랍스터, 대저 토마토, 오세트라 캐비어’와 또 다른 칵테일의 조합을 경험할 차례.
사라우츠 피스코 사워와도 충분히 잘 어울리지만 요리 개발 과정에서 “신선한 바다의 맛과 대지의 기운을 잘 표현한 플레이트와 주시한 칵테일 한 모금의 조합”을 떠올린 만큼 히비스커스를 인퓨징한 바스크 지방 진, 껍질까지 사용한 귤을 베이스로 한 ‘아마네세르’를 추천한다. 물론 식전주로도 제격이다. 산도와 쌉쌀함의 조화가 입맛을 제대로 돋아줄 것이다. ‘아침을 맞이하다’, 혹은 ‘동이 트다’라는 뜻의 스페인어와 잘 어우러지는 맛일뿐더러 김지민 바텐가 바텐더 생활을 <사라우츠>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 또 아직 한국에서 흔치 않은 파인다이닝과 칵테일 바의 조합이 새롭게 출연했다는 의미도 함께 녹여냈다. “다이닝에서 일하는 만큼 계절마다 새로운 허브와 향신료, 식용꽃과 과일, 채소 등을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어떤 술과 접목할지 고민하는 순간이 즐겁다”는 김지민 바텐더에게 한 번쯤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떨까. “이 칵테일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라고. 스토리텔링을 중시한다는 그에게 이만큼 짜릿하고 자신 있는 질문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Bartender’s TIP
파인 다이닝 코스에 칵테일? 여전히 물음표를 지우기 어렵다면 <사라우츠>에서 핀초스와 함께 먼저 즐겨 보길 바란다. 시그너처 칵테일 외에도 평소 취향을 말해주면 바텐더의 커스터 마이징 칵테일도 가능하다. 취향이란 게 별 것 아니다. 좋아하는 과일, 음식, 맛 등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건네주길 바란다.
EDITOR. 장새별
PHOTOGRAPHER. 윤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