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변방의 바 


Vol.3 <정온> 배세민 오너 바텐더


단언해본다.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 ‘오직 바 호핑’을 위해 문정동으로 향해본 이가 없을 것이라고. 언뜻 광화문과 닮았다. 거대한 오피스 빌딩, 한 블록 너머엔 아파트 단지가 펼쳐진, 일과 거주가 공존하는 곳. 퇴근 벨이 울리면 소주와 맥주를 마시는 왁자지껄한 풍경까지. 하지만 광화문이 양옆으로 서촌과 북촌이라는 제법 든든한 동네를 곁에 두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곳은 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고요한 변방의 섬에서 땅을 다지고, 섬을 둘러싼 물결에 작은 파동을 흘려보내고 있는 배세민 바텐더를 만났다. 한국 바 신의 화려한 격전지까지 거친 그는 지금 어디로 노를 젓고 있을까.


<주신당>, <참>, 그리고 <제스트>를 거쳤다. 각각 스타일이 다른데 어떤 점을 배웠나. 

첫 시작인 <주신당>은 오픈 준비 때부터 합류해 공간 기획 과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업장을 운영하다 보니 장지호 대표의 기획력과 추진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참>에 놀러갔다가 임병진 대표에게 간택 당해서(웃음) 파트타이머로 시작했다. 당시 손을 다친 상태였는데 바텐더 사이에서 그곳은 아이돌 같은 존재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료 메이킹부터 서비스까지, 바텐더로서의 기반을 다진 곳이다. 그러다 일명 ‘홀수 연차의 고비’가 찾아왔다. 손님들이 잘한다고 칭찬해 줘도, <참>의 후광 안에 있음을 스스로 알았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싶어 임병진 대표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고 <제스트>로 옮겼다. 제로 웨이스트라는 명확한 주제와 더불어 인테리어, 칵테일 등 당시엔 모든 것이 새로운 바였다. 또 직원 체계부터 운영까지 시스템화 되어 있어서 그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름 굵직한 바를 거친 만큼 <정온>을 오픈할 때 압박도 있었을 것 같다. 

없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제스트> 퇴직 후, 바텐더를 그만하겠다고 한 차례 선언(?)도 했던지라 압박이 두배였다. 활기 넘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 앞만 보고 달리다 제 풀에 꺾인 것이다. 지금은 안다. 힘들면 살짝 천천히 가도 된다는 것을.


바텐더를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돌린 계기가 있나.  

회사 생활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낮에 생활하고, 퇴근 후 누군가와 저녁을 함께 먹고… 그런 게 고팠던 것 같다. 바텐더가 주변에 사람은 정말 많지만 외로운 직업이라고 늘 생각했으니까.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정작 내가 친구를 찾을 땐 곁에 없는 느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해야겠더라. 결정적으로, <제스트>가 월드 50 베스트 바 순위에 처음 입성했을 때 집에서 라이브를 보고 있었다. 김도형 대표가 아내 분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한 참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다. 지쳤다고, 원하는 삶이 있다고 가진 걸 내려놓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잘 풀어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칭얼거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악물고, 다시 시작한 게 <정온>이다.


이 악물고 시작한 바. 어떤 곳을 만들고 싶었나. 

기대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충족시키고 싶었지만, 무엇보다 문정동에 걸맞은 바를 만드는 게 당연했다. 바 호핑을 하러 오는 동네가 아니지 않나. 무겁지 않고, 어렵지 않은 편안한 바를 만들고 싶었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서 무조건 지상에 위치해야 했고, 아늑한 무드를 줄 수 있는 주광색 조명에 샌드톤과 우드톤을 인테리어에 활용했다.


이 공간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는다면. 

내가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입구 전면이 큰 창으로 이루어진 것. 계절감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풍경이 곧 인테리어가 된다.


앞만 보고 달리다 제풀에 꺾였던 그가 돌아온 곳은,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는 변방이다. 그는 이 공간에서 '창밖의 계절'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다. 벚꽃이 날리고, 녹음이 짙어지고,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이는 풍경. 어쩌면 그가 이 악물고 다시 돌아와 만들고 싶었던 것은, 스스로가 가장 먼저 위로받을 수 있는 풍경이었을지 모른다. 너무 뜨거울 땐 차갑게, 너무 차가울 땐 뜨겁게 삶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곳, <정온定溫>처럼.

왜 문정동이었나. 

바텐더로서 가장 오래 활동한 곳이 종로구인데, 주거와 상업이 공존하는 면에서 비슷한 동네라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완전히 오산이었지만.(웃음) 바를 일구기에 녹록지 않은 곳임은 분명하다. 주말이면 거의 유령도시에 가깝다. <정온>이 위치한 건물은 ‘언제나 열려 있는 곳’의 대표주자인 편의점이 주말에 닫을 정도다. 바를 일구기에 녹록지 않은 곳임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 문정동을 선택할 것 같다. 이 동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조금만 걸으면 가락시장도 있고, 한 블록 너머엔 주거 단지만의 일상이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더 많은 바가 생겼으면 좋겠다.  


문정동 바 호핑 코스를 추천한다면. 

<정온> 오픈 후 문정동에만 4곳 정도의 바가 생겼다. 업장 오픈 전에 가게에 들렀던 분들에게 이 상권에 대해 여과 없이 말했는데 결국 오픈을 해버리더라.(웃음) 정말 고마운 동지들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캐주얼하고 음식과 함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다면 <파티나>를 추천한다. 위스키를 좋아하면 <도시술>. 위스키 매니아 대표님이 오픈한 곳으로 독립병입이나 유니크한 라인업을 만나볼 수 있고 가격도 합리적이다. 우리 가게에서 1분 거리에 있는 <마쥬>는 접객이 푸근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라 나도 자주 찾는다. 동네 바 대표들과 워크샵도 계획하고 있다. 같이 ‘으쌰으쌰’하며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싶다.


서두에 이곳을 ‘섬’이라 표현했지만, 배세민 바텐더는 홀로 고립되기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적극적으로 주변 상권에 말을 걸고, 손을 내밀며 문정동이라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었다. ‘으쌰으쌰’라는 그의 표현은 이 변방의 바 신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닻일 것이다.


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곳인만큼, 가격 논쟁도 더러 있을 것 같다. 

바 안에서는 아니고 유튜브 채널에 가볍게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칵테일 한 잔에 2만원 초반이라는 이야기에 악플이 엄청나게 달렸다. 이해한다. 나도 바텐더가 아니고, 이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갈 길이 멀다고 느꼈고, 겸손해지는 계기가 됐다. 잘 한다고 칭찬받는 것은 여전히 바 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 것이고, 더 잘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자신은 있다. 일단 오시면, 한 잔의 값이 절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할.

<정온>에 왔다면 ‘이것만은 마셔봐라’하는 칵테일이 있나.  

먼저 '팝콘'. 술을 잘 못하시는 분들도 바에 오곤 하는데 취한 사람들 보면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보니 흔히 말하는 ‘팝콘 각’일 것 같더라.(웃음) 저도수나 논알코올 칵테일로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영화관 매점 담당으로 일할 때 생각한 메뉴다. 잘게 간 팝콘, 팝콘을 튀길 때 사용하는 팜유에서 착안한 코코넛 워터, 우유, 레몬, 심플 시럽을 위스키에 넣고 인퓨징한 뒤 밀크 워싱으로 투명하게 뽑아낸다. 이후 팝콘 튀길 때 사용하는 버터 시즈닝을 넣은 크림을 올려 서브한다. 다른 하나는 ‘슬로우맨’. 슬로우 푸드로 만든 맨하탄이라는 뜻이다. 한국적인 재료를 쓰는 것을 좋아해서 제주에서 나는 꿩엿으로 데메라라 시럽을 대체하고, 사려니숲에서 나는 꿀로 만든 미드(꿀술), 백년초를 위스키에 배합한다. 가니시는 체리 대신 블러드 오렌지 퓌레와 체리잼으로 만든 젤리를 올린다.


시그너처 칵테일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설명해서 납득시켜야 하는 맛은 지양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마셨을 땐 일단 맛있어야 한다. 즉, 맛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칵테일을 선호한다. 더해지는 스토리는 재미가 되어야지, 주입식 설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상 경험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공감가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바텐더로서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은.  

‘서비스하는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손님과 너무 친해지면 나도 모르게 무례해질 수 있다. 전문직인 만큼 누군가는 내가 아는 게 손님보다 더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바텐더는 결국 손님을 즐겁게 해주려고 있는 사람이다. 많은 상황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바텐더이고 싶다. 프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메이킹을 하고, 심지어 바를 깔끔하게 정돈하는 것 모두 결국 손님을 위한 것 아닌가.


<정온>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바텐더 생활을 꽤 했다 보니, 아직까지는 배세민이라는 사람을 보러 오는 분들이 많다. 원맨툴 느낌이랄까. 내가 <참>이나 <제스트>에서 일할 때 자부심이 엄청났다. ‘내가 여기의 일원이라니, 난 1인분도 못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채찍질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좋은 팀원들을 맞이해서 비전을 제시하는 공간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아닌 공간 자체로 인정받는 곳이 되길 바란다. 욕심이 많고, 그 욕심만큼 열심히 할 생각이다.   



EDIT. 장새별

PHOTO. 윤동길

ASSIST. 염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