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변방의 바


Vol.2 <기슭> 이동환 오너 바텐더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세대가 어우러져 살고, 주말이면 북한산을 오르려는 등산객들로 이른 새벽부터 붐비는 곳. 지하철역을 나와 바로 향하는 동안 이어지는 시장 길에선 장을 보러 나온 어르신들과 스치듯 부딪히는 풍경.

걸을 수록 의아했다. 바 문화는 커녕 요즘 뜨는 동네도 아니다. 그는 어째서 화려한 도심이 아닌 북한산 기슭, 불광동의 조용한 골목을 택한 것일까. 바텐더에게 바 운영이 산행과도 같아서일까. 계속 오르다 보면 어느새 힘든 줄도 모르고 즐기게 되는 순간이 오는, 고되고도 결국엔 즐겁기에.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도달한 바에는 메뉴판으로 접은 종이비행기부터 불량식품까지. 장난스럽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도, 공간과 손님, 음료를 대하는 말들에 묵직함이 배어 있는 이동환 바텐더가 있었다. 어느덧 오픈 4주년을 앞두고 있는 <기슭>을 정복하고 왔다.

언제 바텐더가 되었고, 어떤 길을 걸어왔나.

첫 커리어는 콘래드 호텔의 호텔리어였다. 레스토랑에서 바 업무를 맡으면서 음료 쪽에 관심이 생겼고, 특히 와인이 주를 이루다 보니 소믈리에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바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와 ‘칵테일’ 문화를 접했다. 꾸밈없는 내추럴한 공간이었고, 그날 바텐더라는 직업에 강하게 끌렸다. 

아마 처음 경험한 바가 샹들리에가 반짝이고 인테리어가 화려한 곳이었다면 바텐더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후 라이즈 오토그래프 컬렉션 호텔의 루프탑 바 <사이드 노트 클럽>에서 근무하던 중, <바 참>의 임병진 바텐더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2018년부터 2021년 초까지 함께 일했고, 같은 해 말에 <기슭>을 열었다.


바를 오픈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나.

<바 참>의 세컨 브랜드인 <뽐>이 생기면서, 내가 <바 참>을 도맡게 됐다. 당시에도 임병진 바텐더는 물론 바 자체의 인지도도 높아서 손님이 정말 많았다. 영업 시작과 동시에 웨이팅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다보니 단골들이 점점 오기 어려워졌고, 문득 ‘나는 진정으로 즐기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적으로도 지쳐있었고,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이제 내 걸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마침 코로나가 겹치며 모두가 무기력했던 시기였다. ‘어쩌면 코로나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불확실했기에, 내 커리어에 변화를 줄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기슭>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바가 북한산 ‘기슭’에 있다. ‘슭’이라는 글자의 겹받침이 주는 형태적 아름다움이 마음에 들었고, 단어 자체가 독특하고 위트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면 ‘기슭’은 비탈의 아랫부분을 뜻하니까, 늘 위로만 오르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편하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보자는 의미도 담았다.


수많은 동네 중 ‘연신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향이라 정서적으로도 익숙했다. 다이내믹한 서울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정감 있는 동네다. 골목을 걷다 ‘여기에 차리면 동네 바의 느낌을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처음 접했던 바는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언제든 편하게 들를 수 있고, 오늘은 누가 있을까 기대하게 되는 공간. 내가 위로받고 즐거움을 느꼈던 그 경험을 다시 재현하고 싶었다.


로데오 거리나 역 주변 메인 상권이 아닌 주택가 골목을 택한 이유는.

술은 즐거울 때도 생각나지만, 숨고 싶을 때도 생각난다. 북적이는 네온사인보다 조용한 골목이 내 성향과 맞았다. 물론 주택가라 민원이 들어올 때도 있고, 운영상의 어려움도 있지만, 나는 내향적인 편이라 이 정도 거리가 오히려 적당하다고 느낀다.

‘불모지’에서 바를 운영하며 어려움은 없나.

다행히 생각보다 큰 어려움은 없다. 은평구에는 <기슭>이 오픈하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 터줏대감 같은 바도 있고, 우후죽순 늘지는 않지만 새로운 바들도 꾸준히 생기고 있다. 그래도 상권이 형성될 것 같진 않지만.(웃음) 초반엔 손님의 70% 정도가 먼 곳에서 찾아왔지만, 지금은 절반이 동네 손님이다. 혼자 왔다가 친구나 연인이 되어 나가기도 하고, 결혼한 커플도 있다. 이곳에서 작은 역사들이 생겨난다. 또 은근히 연신내에 사는 바텐더들이 많고, 새벽에는 택시 타면 종로에서 연신내가 금방이라, 많이들 찾아와 주신다. 


바 문화의 특성을 감안해도, 저녁 8시에 오픈하고 새벽 5시에 마감하는 건 상당히 늦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코로나 이후 전반적으로 바들의 영업 시간이 짧아졌다. 그만큼 밤을 즐길 수 있는 선택지도 줄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예전보다 재미가 덜하지 않나? 늦게까지 하면 누군가는 흥미로운 마음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또 현실적으로 이 동네엔 걸을 만한 거리나 구경할 곳이 많지 않아서, 저녁을 먹고 늦게 한잔하러 오기 좋다. 그래서 아예 늦게 열고 늦게 닫기로 했다. 다행히 새벽 5시까지 늘 손님이 있다. 다른 바의 바텐더들이 영업 끝나고 회식하러도 많이 온다.


메뉴판에 ‘악수/포옹/입맞춤’ 카테고리가 인상적이다.

사람이 친해지는 스킨십 단계를 위트 있게 풀어봤다. ‘악수’는 처음 방문한 분들에게 건네는 인사로, ‘연서시장 로망스’, ‘북한산’, ‘불광 2024 F/W’처럼 동네를 담은 칵테일들이 있다. 

‘포옹’은 70~90년대 디스코 시절의 파티 드링크를 기슭 스타일로 재해석한 메뉴, ‘입맞춤’은 고도수의 슈터 칵테일 카테고리다. 네그로니, 올드패션드, 마티니 같은 클래식 칵테일도 슈터화했다. 


그 시절 파티 드링크라면 어떤 것들인가.

지금은 잘 주문하지 않는 피냐콜라다나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같은 칵테일이다. 자극적인 네이밍을 사용하고, 시럽이나 크림이 많이 들어가던 시절이라, 음료씬에서는 ‘암흑기’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슭>에서는 요즘 입맛에 맞게 비주얼과 플레이버를 새롭게 디벨롭했다. 피냐콜라다를 떠올리면 여름, 휴가, 풀의 싱그러움이 연상되지만, 가을/겨울에 먹는 피냐콜라다는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재해석하고,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스모키한 스타일의 티를 우려서 50cm짜리 긴 잔에 서브한다. 독특한 잔만으로도 즐겁고, 손님들이 셀카도 많이 찍는다. 


시그니처 칵테일을 소개해 달라.

입맞춤 카테고리에 있는 슈터 칵테일들과 악수 카테고리의 ‘북한산’을 소개하고 싶다. 슈터 라인업은 올드패션드, 네그로니, 더티 마티니, 솔티드 블로우 잡, 하드 스타트, 포드 앤 페라리, 플랫라이너까지 7종이다. 그중 ‘하드 스타트’는 하루의 챌린지를 이겨내고 바에 온 손님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칵테일이다. 특히 베이스로 사용하는 페르넷 브랑카는 ‘바텐더 사이의 시크릿 핸드셰이크’라는 의미가 있어, 바텐더 손님에게 종종 웰컴주로 내기도 한다. ‘플랫라이너’는 데킬라와 삼부카라는 리큐르 사이를 타바스코가 막고 있는 모양으로 층층이 쌓여있는데, 바이탈 사인이 멈춘 모습을 형성화했다. 긍정적인 의미로, ‘죽여주게 맛있는 칵테일’이랄까. 마실수록 눈이 충혈될 만큼 강렬하다.

‘북한산’은 밤의 산에서 느낄 수 있는 향과 바람에서 영감을 얻었다. 야생의 느낌을 내기 위해 압생트와 아마로로 산의 허브와 흙내음을 표현했다. 특히 압생트를 상징하는 초록색을 민트 오일로 강조해, 화려한 수묵화 같은 이미지를 냈다.

2주마다 업데이트되는 부록 메뉴는 무엇인가. 

<기슭>의 바텐더들은 모두 QR코드 모양의 헤나를 하고 있다. 각자가 2주 동안 고민해 손님에게 추천하고 싶은 메뉴를 그 링크에 올린다. 메뉴판에 설명이 있어도 ‘모르겠다’는 손님들이 많아, 아예 바텐더가 메뉴가 되어보자는 발상이었다. 각자 메뉴와 페이지를 스스로 관리하며, 음료뿐 아니라 음식을 올릴 수도 있다. ‘<기슭>에서는 이렇게 해야 돼’라는 제약 없이 각자의 개성과 스토리를 담은 바텐딩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최근 타투이스트가 정식 직업으로 인정받았는데, 바텐더 역시 비슷한 직업적 편견을 마주해 온 직종인 만큼 그들을 응원하는 의미도 담았다.


메뉴판을 종이비행기로 접을 수 있거나, 호출벨 역할을 하는 닭 장난감도 독특하다.

메뉴판에 공을 들이는 곳도 많지만, 자유롭게 찢고 변형할 수 있게 하고 싶어 뒷면에 종이 비행기 접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종이 비행기를 접으면서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 확인도 하고, 멀리 날리기로 술값내기도 한다. 호출벨은 홀 손님들을 위해 뒀는데, 소리가 커서 자꾸 꿈에 나오더라.(웃음) 또 용건이 없는데 재미로 누르시는 분들도 있어서 지금은 없앴다. 평소에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이런 아이디어들이 나오는 것 같다.


기본 안주로 뻥튀기를 제공하고 불량식품을 자유롭게 가져다 먹을 수 있게 한 것도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최근 리뷰 중에 ‘사장님이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좋게 보이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있었다. 정곡을 찔렀다. 멀리서 찾아오신 분들께 실망을 드리고 싶지 않다. 이 자리가 15년 전에는 문방구였다. 불량식품은 어린시절의 달콤한 기억이기도 하니까 일종의 ‘굿즈’처럼 두었다. 당장 안 먹더라도 다음날 발견하면 기분이 좋지 않나. 뻥튀기는 근처 가게에서 사는 건데, 구산동에 서울 전역으로 납품하는 뻥튀기 공장이 있어 신선함(?)이 남다르다.(웃음) 손님들이 그걸로 가면을 만들기도 하고, 하트 모양도 만든다. 손님 분들 중에 뻥튀기 아티스트가 많다. 나는 아이템을 제공할 뿐, 유쾌하게 만드는 건 손님들이다.


‘은평구의 자랑’이라는 후기가 많다. <기슭>의 강점은.

<기슭>의 가장 큰 힘은 진심이다. 화려한 바텐딩을 하거나 말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손님 한 분 한 분에게 진심을 다한다. 이곳에서 각자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오픈을 준비하던 때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연신내를 선택하겠나.

그렇다. 연신내는 나와 닮은 동네다. 느리지만 단단하고 정감 있다. 너무 멀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그럼 오지 마라!”한다.(웃음) 격전지의 바텐더들처럼 교류가 활발하진 않지만, 나는 귀가 얇고 심지가 약한 편이라, 가까이 있었다면 오히려 나만의 바텐딩 방향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천천히 나만의 방식을 쌓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목표는.

<기슭>이 오래 유지되길 바란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이곳에 애정을 가진 분들이 많다. “아이가 성인되면 같이 오고 싶다”는 손님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더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최초 공개인데, 2호점을 준비 중이다.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말해야 실행이 되더라.(웃음) 기슭의 정체성을 살리되, 상권과 조금 더 가까운 곳을 고려 중이다. 남산 기슭, 신용산 기슭처럼. 

사실 ‘코미디와 바의 결합’을 생각하고 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억지로라도, 간지럽혀서라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마도 칵테일에 집중한 바는, 연신내 <기슭>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EDIT. 홍수연

PHOTO. 염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