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누구나 알 만한 글로벌 IT 기업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쌓아오다, 돌연 수제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다. 단순히 맥주가 좋아 시작했다고 겸손히 말하기에는 그 성공은 컸고, 그래서 ‘한국에서 위스키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을 때 막상 두려움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2018년 증류소를 설립하고 꼬박 7년이 지난 2025년. 그의 용기 있었던 도전은 IWSC* 수상에 이어, 쟁쟁한 후보들과의 경쟁 속에 SFWSC*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또 한 번의 증명으로 이어졌다. 인터뷰 내내 그는 “한국인이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위스키를 만들고 싶다”고 거듭 강조하면서도, 기원만의 성공이나 성장보다 한국 위스키 시장, 나아가 위스키 시장 전반의 성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가 말하는 이번 수상의 진짜 결실은 기원 위스키만의 성과나 결실이 아니다. 한국 위스키의 도약을 가능하게 할 도움닫기다.
*ISWC(International Wine&Spirit Competition)
영국 런던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 와인ᐧ스피릿 품평회로, 1969년 설립 이후 전 세계 와인과 증류주 산업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대회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SFWSC(San Francisco World Spirits Competition)
수천 종의 주류를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한다. 세계적 권위의 스피릿 대회로, 품질을 판단하고, 인증하는 글로벌 수단으로도 인정 받는다.
2025년 하반기 IWSC, SFWSC에서 수상하는 등 축하할 일이 많았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태극기를 들어올린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수상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너무 영광스러운 한 해였다. 위스키를 만들면서 언젠가는 글로벌 어워드에서 상을 타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일찍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한국을 대표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영광스러웠다. 당시 한복 차림이었는데 소매 안에 태극기를 챙겨갔다. 국기를 챙겨간 건 나뿐이었다. 그 순간에 태극기를 들어 올릴 수 있어서 더욱 뜻깊었다.
한국 사람이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위스키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애국심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웃음).
수상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체감되는 변화가 있나.
180도 달라졌다. 기원은 해외 박람회에도 자주 참여하는 편인데, 수상 전에는 우리 부스에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다. 반면 수상 이후 싱가포르와 도쿄에서 열린 박람회에 참가했을 때는 시음을 하려는 관람객들이 줄을 이뤘다. 업계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애호가들까지 관심을 보이는 걸 보며, 수상의 영향이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기원을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한국의 바 쇼 같은 행사에 오는 분들도 대부분 애호가들이라 기원이 주목을 받지만,한국 위스키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올해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원을 알리는 것이 목표다.
증류소를 처음 세운 2018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해외에서 바라보는 ‘K-위스키’에 대한 시선은 어떻게 달라졌나.
기대감이 확실히 높아졌다고 느낀다. 특히 업계 관계자들의 기대가 큰 편이다. 한국, 그것도 젊은 증류소가 상을 받았다는 점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우리를 계기로 K-위스키 시장 전반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함께 높아졌다면 더없이 기쁘다. 한국 위스키 시장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앞으로는 다른 증류소들도 더 주목받고 수상의 기회를 얻었으면 한다.
맥주 양조를 직접 할 만큼 주류에 깊게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나.
그냥 술이 좋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해외에서 오래 생활했는데, 외국에서는 석양을 보며 와인을 마시거나, 추운 날 캠핑을 하며 위스키를 나누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술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Social Lubricant, 사회적 윤활유 같은 존재다. 적당히 즐기는 술은 개인을 넘어 사회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수제 맥주 핸드앤몰트의 성공 이후 다시 위스키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어떤 갈증이 있었고, 왜 하필 위스키였나.
개인적으로 위스키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당시 한국 주류시장에서 고가의 프리미엄 선택지가 많지 않다고 느꼈다. 일반적으로 GDP가 올라가면 술에 투자하는 비용도 함께 증가한다. 한국 전통주 가운데 고가 제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어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국의 프리미엄 술 시장은 분명히 성장할 거라 봤고, 그 가능성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장르가 위스키라고 생각했다.
위스키 숙성에 있어 한국의 사계절은 어떤 영향을 미치나.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이 극과 극의 날씨가 오히려 보물이다. 나무는 기온이 높으면 팽창하고 낮으면 수축하는데, 이 과정에서 원액을 머금었다가 다시 뱉어내기를 반복하며 위스키가 숙성된다. 기온 변화가 크다 보니 이 과정이 잦고 단순히 숙성이 빨리 되는 게 아니라 복합적인 풍미가 생긴다. 그 결과 한국에서의 1년 숙성이 스코틀랜드에서 4~5년 숙성한 것과 비슷한 특징을 만든다. 한국이 충분히 위스키 강국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지점이다.
말한것처럼 지역과 기후가 중요한데, 증류소가 위치한 남양주는 어떤 이점이 있나.
이전에 운영하던 수제 맥주 양조장이 지금 증류소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맥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료가 물인데, 남양주는 ‘깨끗한 물’로 유명한 지역이다. 과거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 라벨에 어떤 계곡의 물을 사용했는지까지 표기하곤 했다. 그만큼 위스키에서도 물맛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또 이미 이 지역의 환경과 날씨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후적으로도 위스키를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
단연 주세법이다. 바뀌어야 할 지점이 많다. 예를 들면 RFID 태그는 이제 없어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가짜 술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걸 막기 위함인데, 요즘은 그런 경우가 없다시피 한만큼 불필요한 비용이라 생각한다. 또 전통주는 지역에서 나는 원료를 사용하면 전통주 카테고리로 분류돼 온라인 판매가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더 좋은 환경에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위스키는 100% 한국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도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가평에 보리 농장도 가지고 있지만, 제도적인 혜택을 받기 어렵다 보니 한국 재료만을 사용하는 선택이 쉽지 않다. 이외에도 개정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지점들이 많다.
기원 위스키만의 제조 철학, 혹은 ‘한국적인 위스키’를 만들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이 있나.
음.. 없다(웃음). 처음이기 때문에 선도하며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밀이 없다. 국내외 할 것 없이 필요하다면 우리의 방식을 참고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게 위스키 시장을 함께 키워갈 수 있길 바란다.
1~2년 전에 일본 위스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원액이 부족해졌고, 스코틀랜드에서 들여온 원액을 일본에서 병입만 하거나 일본 위스키를 소량 블렌딩해 ‘재패니즈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위스키라면, 한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당화, 발효, 증류 숙성까지 위스키를 만드는 전 과정이 한국에서 이뤄져야 ‘한국 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해외 원액을 블렌딩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조 과정 전반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신경 쓰는 포인트는 무엇인가.
어떤 하나를 꼽기 어렵다. 숙성, 발효, 증류 모두 중요해서 마치 자식들 중 누가 제일 좋으냐고 묻는 것과 같다(웃음).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자면 증류다. 위스키의 원주가 될 증류액을 어떻게 잘 만들 것인가. 이 과정만큼은 타협이 없다.
발효 시간이 72~120시간으로 다른 위스키보다 긴 편이다. 위스키에 어떤 영향을 주나.
보통 발효 과정에서 효모는 60시간 정도 지나면 다 죽고, 이후에는 발효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죽지 않는다. 효모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남아 있는 동안 에스터*가 더 많이 생성된다. 이 과정에서 시트러스나 오렌지 같은,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향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액을 증류하면 그 풍미가 증류 과정에도 남아 있고, 결과적으로 원주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에스터(Esters)
과일 향, 꽃향기 등 달콤하고 향긋한 풍미를 만들어내는 화학 화합물. 위스키의 맛과 향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향미 성분 중 하나로, 주로 발효와 증류 과정에서 산과 알코올이 반응하여 생성된다.
현재 증류소에는 몇 개의 오크통을 보유하고 있나. 특별한 오크통도 있는지 궁금하다.
약 5,000개 정도다. 증류소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오크통이다.
한국 전통주와의 협업도 활발한데, 전통주를 숙성했던 캐스크가 100종 정도 된다. 그 술들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우리 위스키 원액에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면 좋겠다.
시그니처 라인업인 호랑이, 독수리, 유니콘을 소개해 달라.
처음에는 세 명의 창립자가 있었다. 한 명은 스코틀랜드인, 한 명은 한국인, 그리고 한 명은 재미교포인 나였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동물을 제품명에 담았다. 한국을 상징하는 ‘호랑이’는 셰리 캐스크에서 숙성한 달콤하고 프루티한 위스키로,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만한 스타일로 완성했다.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는 미국 버번 위스키 같은 달콤한 캐러멜과 바닐라 풍미에 무게감과 깊이를 더하기 위해 켄터키 버번 캐스크와 미주리산 뉴 오크를 사용했고,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유니콘’은 아이리시 스타일의 피트함과 스모키함이 느껴지는 위스키다. 라벨에 분홍, 노랑, 초록색을 사용한 것도 한복의 색감에서 영감을 얻었다. 1번부터 6번까지 여러 배치를 만들어본 뒤, 반응이 가장 좋았던 제품들을 셀렉해 시그니처 라인업을 완성했다.
최근 선보인 레드 페퍼 캐스크는 국산 홍고추를 사용했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마스터 디스틸러인 앤드류 샌드Andrew Shand가 만들었다. 원래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데, 어느 날 시장에서 홍고추를 보고 와서는 매운 진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고민하다 위스키로 다시 풀어보기로 했다. 오크통 안에 자른 홍고추와 뜨거운 물을 넣고 2개월 동안 향을 입힌 뒤, 오크통을 비우고 그 자리에 위스키 원액을 채운다. 캐스크 자체에 홍고추의 풍미를 입힌 것이다. 첫 향에서 홍고추와 바닐라, 과실 향이 퍼지고 끝에 다시 홍고추의 매콤한 한방이 있는 제품이다.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수출도 활발하다. 해외 시장에서 한국 위스키에 대한 반응 중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다면.
박람회에서 기원 부스에 시음하러 온 분들이 “누가 추천해줘서 왔다”고 말할 때 가장 뿌듯하다. 누군가에게 추천했다는 건 그만큼 만족도가 높았다는 뜻이니까. 현재 14개국에 수출하고 있고, 올해는 영국과 프랑스에 집중할 계획이다. 중국 진출도 고민 중이다. 수출 국가 중에서는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과 일본에서 특히 반응이 크다.
지금의 기원이 있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시간을 꼽는다면.
역시 시작할 때다. 시간과 돈을 많이 들였던 만큼 두려움이 컸다. 과연 좋은 위스키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수제 맥주부터 위스키까지 유의미한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아쉽지만(?) 지금으로서는 특별한 다음 계획은 없다(웃음). 현재로서는 기원을 글로벌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기원이 있고, “기원 마시고 싶다”는 말을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DIT. 홍수연
PHOTO. 윤동길
ASSIST. 염서정
ki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