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절제로, 맛은 탐닉으로 
리엔스가 빚어낸 동양적 감각

오리엔스 ORIENS

한국 최대 바 밀집 도시는 서울. 거주지가 이곳이라면, 다른 도시의 이름이 웬만해서는 바 호핑 리스트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작정하고’, ‘언젠가’ 가 볼 위시리스트라면 모를까. 판교도 마찬가지. 하지만 막상 가보면 막연히 멀게 느껴졌던 건 가보지 않았기 때문임을 단박에 알게 된다. 

신분당선을 타면 서울에서 30분, 한적한 시간에 택시를 타고 내달리면 그 마저도 걸리지 않는 거리. 얼마든지 가볍게 닿을 수 있는 곳에, 우리의 ‘위시 리스트’를 당장 오늘 밤의 ‘목적지’로 바꿔놓을 만한 공간이 생겼다. <닙스>를 운영하며 판교라는 동네에 대한 확신을 얻은 구상옥, 이진우 바텐더. 여기에 김성연 바텐더가 힘을 보태며 함께 만들었다. 차분한 오리엔탈의 미학으로 무장한 <오리엔스>다.

세 바텐더의 합주로 완성한 공간

 

구상옥, 이진우 바텐더는 서판교, 운중동에서 <닙스>를 함께 운영하며 이미 호흡을 맞춰왔다. 여기에 <르챔버>, <스틸>, <키퍼스>, <무드 서울>, 조선 팰리스 호텔을 두루 거친 18년 차 김성연 바텐더가 합류하며 <오리엔스>의 뼈대가 완성됐다. <닙스>가 빠르게 자리를 잡으며 두 오너가 확장을 고민하던 시기, 역시 바 오픈을 준비하고 있던 김성연 바텐더와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 판교에는 전반적으로 클래식한 성향의 바들이 자리잡고 있는 바, 콘셉트가 선명하면서도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닙스>를 통해 ‘동네’ 상권을 경험한 만큼 이번에는 중심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한국인으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을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한 이후로는, 두 바텐더의 든든한 응원 속에 김성연 바텐더의 주도적인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숨겨진 동양미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곳


오리엔스(Oriens)는 라틴어로 ‘해가 뜨는 곳, 동방’을 뜻하는 말로, ‘오리엔탈(Oriental)’의 어원이기도 하다.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요소를 자신들만의 문법으로 번역해 냈다. 이때 중요한 건, 단어가 품고 있는 이미지를 손님에게 1차원적으로 주입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옥을 그대로 옮겨놓는 대신 천장의 전통 문양 목재나 수납장의 경첩 등의 세밀한 디테일로 은근한 동양미를 심어두었다.   

백바 중앙에 놓인 고가구도 눈에 띈다. 수납의 효율을 포기하면서까지 여백을 둔 이유는 분명하다. 빽빽한 상업지구의 풍경과 대비되는, 편안한 쉼의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인테리어뿐 아니라 조명과 음악, 공간을 채우는 향기까지 ‘편안함’이라는 일관된 기준으로 설계했다. 화이트 톤의 가운 유니폼과 통창 너머로 공원과 하천 뷰 역시 바를 찾는 이들의 긴장을 기분 좋게 허물어뜨린다.  

페루비안 바이츠
페루비안 바이츠
세이버리 팔로마
세이버리 팔로마

이 바가 오리엔탈을 잔에 담는 방식


메뉴판을 펼치면 칵테일마다 차이티, 강황, 당귀, 밤, 누룽지 같은 이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텐더들에게는 익숙하게 다뤄온 재료들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어떻게’ 다룰 것인가다. <오리엔스>는 동양 문화권의 ‘발효’와 ‘차’를 중심에 두고, 각 재료의 본질을 칵테일 속에 치밀하게 구현해내는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김치의 풍미를 담아낼 때도 단순히 김치 국물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배추의 늬앙스를 살리기 위해 김치를 통째로 믹서에 갈아낸 뒤 액체만 걸러 사용한다.

한 번의 결정타가 아니라, 완성된 맛을 일관되게 구현할 수 있는지 수없이 반복해 완성한 결과물이다. 그렇게 탄생한 시그니처 칵테일 ‘세이버리 팔로마’와 ‘페루비안 바이츠’는 이들의 기획력을 잘 보여준다. 데킬라가 멕시코의 매운 음식과 자주 페어링되는 점에 착안한 ‘세이버리 팔로마’는 데킬라, 자몽, 라임 배합의 팔로마에 김치로 매콤한 킥을 더했다. 김치를 씻어 말린 뒤 소금과 함께 갈아 만든 파우더를 잔에 리밍해, 첫 모금부터 발효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페루비안 바이츠’는 피스코 사워를 변형한 메뉴. 지중해식 샐러드에서 영감을 받아 피스코를 베이스로 센차, 바질, 시소, 샐러리, 토마토를 더해 보테니컬하게 풀어냈다. 첫입에는 시소 향이 도드라지지만, 마실수록 각 재료의 향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구조다.

소유 라멘
소유 라멘
쌈장 풀드포크
쌈장 풀드포크

셰프는 없지만 셰프의 레시피가 있는 바


“칵테일이 맛있다”는 말만큼 “음식이 맛있다”는 평을 듣는 바.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바에도 제대로 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세 바텐더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만큼, 냉동식품이나 기성품에 의존하기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 바 서비스를 하면서 주방까지 돌보는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혼자가 아닌 셋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가장 공을 들인 메뉴는 ‘소유 라멘’과 ‘쌈장 풀드포크’. 한 끼 식사로도 손색없는 ‘소유 라멘’은 육수부터 직접 뽑는다. 닭 껍질을 모두 제거하고 4시간 동안 끓여내,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맛을 자랑한다. 여기에 닭껍질, 파, 마늘로 만든 향미유를 더해 한식적인 결을 입혔다. 이 메뉴에는 니카의 타케츠루 퓨어 몰트를 베이스로 한 하이볼을 곁들여 볼 것을 추천한다. 은은한 스모키함과 과실 향이 짭짤한 음식과 좋은 균형을 이룬다. ‘쌈장 풀드포크’는 쌈장과 바비큐 소스로 버무린 돼지고기를 24시간 수비드한 뒤, 오븐에서 한 번 더 구워낸다. 함께 제공되는 백김치는 화이트 와인 비네거와 참기름, 설탕으로 버무려 산뜻하게 마무리했다.

바에서 이토록 완성도 높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건 김성연 바텐더가 조선 팰리스 근무 시절 쌓은 인연 덕분. 현재 압구정 <더 코너 하우스>를 운영 중인 김홍석 셰프의 기본 레시피를 뼈대 삼아, 마치 칵테일을 만들 듯 한 끗의 터치를 더해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오리엔탈이라는 확고한 콘셉트만큼, <오리엔스>가 지향하는 바는 명확하다. 누구든 부담 없이 들러 칵테일 한 잔, 맛있는 음식과 함께 쉬어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 맛의 완성도만큼이나, 이곳에서 흘려보내는 편안한 시간이 무엇보다 매력적인 이유다.



EDIT. 홍수연

PHOTO. 윤동길

ASSIST. 염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