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 이어 2026년, 당신의 술잔을 채울 다섯 가지 스피릿 인사이트.
제3세계 위스키, 그리고 한국
변방으로 취급받던 제3세계 위스키들이 주류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며 뉴 클래식의 자리를 넘보고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 위스키의 약진이 눈에 띈다. 소위 말하는 국뽕 마케팅은 필요 없다. 한국 최초의 싱글몰트 위스키 ‘기원’이 영국 IWSC 최고상에 이어 샌프란시스코 세계주류경연대회(SFWSC)에서 ‘베스트 오브 클래스’를 수상하며 한국만의 기후가 만든 숙성 프로필이 세계 무대에서 통함을 입증했다. 크래프트브로스 역시 SFWSC와 월드 위스키 어워드(WWA)를 석권하며 블렌딩 능력이 글로벌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블렌딩 실험
단순히 로고를 빌리고 빌려주는 마케팅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증류소의 원액을 물리적으로 섞는 과감한 ‘리퀴드 연대’가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미국의 바즈타운 버번 컴퍼니(Bardstown Bourbon Company)가 인도의 암룻(Amrut) 증류소와 손잡고 버번과 인디언 싱글몰트를 섞었는가 하면, 영국의 신생 증류소 빔버(Bimber)와 컴파스 박스(Compass Box)가 협업해 신구의 조화를 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크래프트브로스가 일본 나가하마 증류소, 스웨덴 하이코스트 증류소와의 과감한 블렌딩을 통해 이 국경 없는 실험에 돌입했다. 이것이 주류 시장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지는 미지수. 하지만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다.
캐스크 변칙
셰리 캐스크와 버번 캐스크라는 오랜 양강 체제 위에 과감한 변칙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때, 셰리 캐스크 부족 현상에 따른 마케팅이 아니냐는 시선이 따랐지만 다소 보수적인 스코틀랜드 전통 증류소들이 이 룰 브레이킹을 주도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데이라, 포트 등의 주정강화 와인 캐스크의 세분화는 이제 기본. 럼, 칼바도스, 심지어 데킬라와 아와모리 캐스크에 이르기까지 위스키가 품을 수 있는 풍미의 영역이 무한히 확장 중이다. 한편, 한국의 오크통 숙성 트렌드 역시 뜨겁다. 사과 증류주 추사가 오크 숙성을 통해 한국형 브랜디의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후, 전통 소주 양조장들이 앞다투어 오크통 숙성을 도입하며 숙성 코리안 스피릿이 새로운 장르로 비상하고 있다.
브랜드가 아닌 셀렉터를 구독하다
증류소의 오피셜 보틀이 위스키의 교과서라면, 프라이빗 보틀은 취향에 맞는 이들끼리 공유하는 심화 참고서. 여전히 위스키 선택의 기준이 증류소의 명성을 따르기도 하지만, 차츰 캐스크를 선정한 기획자, 즉 셀렉터의 안목에도 지갑이 열리고 있다.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국내 사례는 바 <로스트앤파운드>의 데틀링. 국내에 소개된 적 없던 생소한 이름의 버번 위스키는 정규 제품 없이, 오직 이 바가 선정한 프라이빗 배럴로만 한국 시장에 성공적인 첫발을 디디며, 두 번째 프라이빗 보틀링도 진행됐다. 브랜드가 아닌, 숨겨진 맛을 찬아낸 큐레이션을 믿고 구매가 일어난 것. 이처럼 프라이빗 보틀은 단순한 한정판을 넘어 셀렉터와 소비자가 취향으로 연대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
포스트 위스키?
스피릿 시장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분명 위스키지만, 그 견고한 성벽 너머로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이 있다. 가장 먼저 승기를 잡은 것은 데킬라. ‘파티 드링크’라는 오랜 누명(?)을 벗고 인공 첨가물을 배제한 ‘애디티브 프리(Additive-Free)’, 원재료의 퀄리티를 내세운 ‘100% 블루 아가베’, 위스키처럼 장기 숙성 등을 앞세워 럭셔리 스피릿 시장에 안착했다. 서울에 전 세계 최초로 오픈한 호세 쿠엘보 플래그십 스토어는 데킬라가 위스키의 대안을 넘어 독립적인 하이엔드 장르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사례.
한편, 럼은 스피릿 시장의 오래된 양치기 소년이다. 10여년 전부터 줄기차게 ‘포스트 위스키’ 0순위로 지목 받았지만, 기대만큼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6년을 앞두고 여러 매체에서 다시금 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번엔 정말 다를까? 독립병입자 헌터랭이 럼 전문 브랜드 킬 데빌을 런칭하거나, 카덴헤드가 위스키와 동일한 엄격한 기준으로 럼을 출시하는 등 고숙성 럼을 내놓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는 하다. 과연 럼이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떼고 비상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DIT. 장새별
PHOTO. 베버리진